현장학습을 사랑한 공자
공자(孔子)는 춘추전국 시대에 노나라 사람으로 동양사상의 기초가 되는 유학(儒學)의 창시자이다. 유학이라 하면 서당에서 주로 책을 읽으며 가르치는 것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제자들과 여러 나라를 떠돌며 현장학습을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그의 교육은 귀족들만 배우는 식의 기존의 틀을 깨고 서당 밖으로 나와 수많은 사람을 만난다. 조그마한 선물로 예를 갖춘 뒤 배움을 청하면 공자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제자로 받아들여 가르쳤다. 공자의 대표적인 제자로는 안회(顔回), 자로(子路), 자공(子貢) 등을 꼽을 수 있다. 공자는 제자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교육했을까.
생사를 통해 깨닫는 제자 안회
안회는 배움을 좋아하고 항상 진실했기에 공자가 가장 아낀 제자였다. 학덕이 높고 재질이 뛰어났으나 안타깝게도 공자보다 먼저 죽었다. 그래서 성인이라는 칭호가 붙어 안자(顔子)로 불린다. 공자가 안회를 가르친 재밌는 일화를 소개하겠다.
어느 날 안회는 공자의 심부름으로 시장에 들렀는데 한 포목점 앞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호기심이 일어서 가까이 가보니 가게 주인과 손님 간에 시비를 벌이고 있었다. 손님은 큰 소리로 "2 x 6은 분명히 10전인데 왜 나한테 12전을 요구하느냐?" 라며 주인에게 따졌다. 안회는 이 말을 듣고 손님에게 "당신이 잘못 계산을 한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 손님은 자신이 옳은지 안회가 옳은지 공자님께 물어보겠단다. 너무나 당당한 요구에 안회는 제대로 혼쭐을 내줄 요량으로 그러자고 했다. 손님은 자기가 틀리면 목숨을 내놓겠다 했고 안회는 머리에 쓰는 장식품을 내걸었다. 그런데 공자는 자초지종을 다 듣더니 안회에게 "네가 틀렸으니 손님에게 너의 장식품을 내주라"라고 답하지 않는가. 그는 자신의 장식품을 손님에게 건네주어야 했다. 스승의 판정에 수긍했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진 않았다. 하지만 속으로는 스승이 너무 늙었고 우매해졌으므로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하고 공자를 떠나기로 마음 먹었다. 다음 날 안회는 오랜만에 부모님을 찾아뵈어야 한다며 공자에게 고향에 잠시 다녀오고 싶다고 말했다. 공자는 아무 말 않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허락하였다. 안회는 다신 돌아올 생각이 없었으므로 모든 개인물품을 챙기고는 스승에게 작별 인사를 하였다. 공자는 가능한 바로 돌아오라고 당부하면서 글을 새긴 죽간(竹簡)을 안회에게 건네주었다. 거기엔 '두 마디' 충고가 새겨져 있었다.
'천년고수막존신(千年古樹莫存身)' - 천년 묵은 나무에 몸을 숨기지 말라
작별인사를 한 안회가 고향길로 향하던 중 갑자기 천둥소리와 번개를 동반한 큰 소나기를 만났다. 잠시 비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에 길 옆 고목 밑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 때 안회는 스승의 첫 충고인 '천년고수막존신(千年古樹莫存身)'을 떠올렸고, 얼른 고목을 벗어나 다른 데로 피신했다. 바로 그 순간, 번쩍하면서 고목은 벼락을 맞아 불이 붙었고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살인부명물동수(殺人不明勿動手)' - 명확지 않고서는 함부로 살인하지 말라
안회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고향 집에 도착했다. 부모님을 깨우지 않으려고 건너편 방에서 자는 아내의 방문을 조용히 열었다. 그런데 컴컴한 침실에 들어가 손으로 천천히 더듬어보니 아내가 다른 사람과 같이 자고 있지 않은가. 자신이 집을 비운 사이 아내가 외간남자와 놀아난다는 생각에 순간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검을 뽑아 내리치려는 순간 안회는 스승의 충고가 떠올랐다. '살인부명물동수(殺人不明勿動手)'. 얼른 촛불을 켜보니 아내와 누이동생이 침대 위에서 함께 자고 있었다. 다음 날 안회는 스승에게 돌아가기 위해 발길을 재촉했다. 그리고 스승의 깊은 뜻을 모른 채 불신한 점을 죄스럽게 생각하며 무릎을 꿇었다. 공자는 마당을 내려와서 안회를 일으켜 세웠다. "안회야! 첫째는 어제 날씨가 건조하고 무더워서 다분히 천둥 번개가 내릴 수가 있을 것이므로 벼락을 끌어들이기 쉬운 고목을 피하라고 했던 것이며, 둘째는 네가 분개한 마음을 풀지 못하였고 또한 보검을 차고 떠났기에 너를 자극하는 조그만 일에도 분명 예민하게 반응할 것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본다면 누구나 그런 상황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공자는 이어서 "만약 포목점에서 너의 말이 바르다고 했다면 포목 사러 온 그 손님은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 있더냐?"라고 말했다. 안회가 스승의 큰 지혜에 감탄했고, 그날 이후로는 공자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처럼 공자는 책 속의 글만 읽고 외우는 게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제자들을 가르쳤다. 공자는 또 노래를 불러 제자들도 따라 부르게 했다. 이런 방식들에 대해 제자들은 가끔 스승을 의심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공자는 적절한 가르침을 통해 제자들을 깊이 깨우치도록 했다.
책을 통해 주로 학문을 접하는 요즘에도 현장 학습의 중요성은 날로 커지고 있다.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우치게 한 공자의 교육법.
갈수록 참 스승을 만나기 어렵다는 개탄이 쏟아지는 가운데
2,700여년 전 중국 춘추시대의 사상가 공자의 체험 교육법이
지금 반짝반짝 빛나는 이유가 뭘까?
미래 교육의 변화에 관심이 있다면 청랑이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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