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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이슈 식견

명함의 변천사

by JadeWolveS 2023. 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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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이미지까지 알리는 수단

기술 발전으로 현대인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늘었다. 하지만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그들은 새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소개할 시간이 부족했다. 그 대안으로 사람들은 자신을 간단히 소개하는 명함을 사용한다. 최근 명함은 자기 경력만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어떤 사람으로 보일지 생각하며 명함에 색깔, 문구, 디자인까지 신경 쓴다. 명함은 이제 자신을 알리는 데 그치지 않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이미지를 각인하는 역할도 한다. 명함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역사를 알아보자.

조선시대 명함 '세함'

홍석모(洪錫謨)동국사세기(東國歲時記)에는 중앙 각 관청의 서리(書吏), 천예(賤隷)나 각 군영의 장교, 군졸들은 세수(歲首)에 현직 상급 관원이나 예전에 상급 관직에 있던 선생(先生) 집에 인사하러 갈 때 세함을 쓴다는 기록이 있다. 즉 아랫사람들이 자신들의 이름을 써넣은 단자(單子)를 만들어 접어들고 상급 관원 집을 찾아가면, 그 집에서는 문 안에 옻칠한 반()을 두어 그 위에 단자를 올려놓게 하였는데 이 단자를 세함이라 하였다. 당시의 세함은 첫 만남에 자신을 알리기 위해서 쓰이는 지금의 명함과는 용도가 달랐다. 그때는 아랫사람이 상급 관원이나 스승께 명절에 찾아뵈었다가 부재중이면 누가 다녀갔는지를 알리기 위해 세함을 썼다. 찾아뵈었던 분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되면 다녀간 흔적이라도 남기려 한 현대판 댓글인 셈이라고 할까. 그러나 엄밀하게 말하면 당시의 세함은 오늘날의 명함과는 쓰임이 달랐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일제강점기는 '명첩'이 명함 역할

16세기 독일에서 이탈리아로 유학 간 학생들이 스승을 방문했는데 만나지 못할 때 카드를 남기는 풍습이 일본을 통해 전해졌다. 일본과 조선도 종이에 성명, 신분, 주소 등을 적어서 만나지 못하는 경우 명첩을 남겨두고 왔다. 방문객의 명첩을 보고 만날 사람을 까다롭게 골랐던 일본 총독은 조선인 사업가 박흥식(朴興植)을 만났다. 그가 명첩을 순금으로 만들어 남겨두고 갔던 것이다. 박흥식은 명첩을 가지고 어떻게 자신을 광고해야 하는지 아는 친일 기업인이었다.

현대 명함, 비즈니스맨의 필수 소지품

일제 강점기 때의 명첩이 발전하여 지금의 명함이 되었고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에게 명함은 꼭 지니고 다녀야 할 필수 품목이 되었다. 시간이 돈인 비니지스맨은 짧은 시간에 자신을 알려야 했기에 명함을 자기 홍보용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다. 저마다 자기만의 색깔을 넣기 위해 명함에도 다양한 디자인을 쓰면서 하나의 광고 시장이 되었다. 또 명함을 주고받는 에티켓과 명함을 관리하는 일까지 생겨났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사용이 확대되면서 명함을 주고받는 경우는 많이 줄어들었다. 그러나 대면하는 비즈니스에서 명함을 주고받는 것은 하나의 예절처럼 자리 잡았다.

 

설날에 상관이나 스승을 방문했다가 만나지 못했을 때
남긴 세함이 오늘날 명함의 시초다.
최근의 명함은 자신을 가장 임팩트 있게 알리는
광고와 같은 역할을 톡톡히 한다.
최근에는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명함을 주고받는 경우가 줄고 있으나
비즈니스맨들은 반드시 지니고 다녀야 할 필수 품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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