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부자는 드러내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에 접어들면서 내가 잘 사는 것을 남에게 보여주려는 의식이 팽배해졌다. 명품은 본인의 부를 과시하는 간접 수단으로써 쓰였고 돈 많은 젊은 세대들이 명품을 과시하는 데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큰 자산을 모은 사람들은 오히려 명품을 사기보다 부를 드러내지 않으려고 더욱 노력한다. 세계 최고 부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워런 버핏은 전날 돈을 많이 썼다는 생각이 들면 다음 날 맥도날드에서 일반 햄버거 대신 맥모닝을 먹는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워런 버핏처럼 부를 감추며 겸손했던 김근행(金謹行)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김근행은 여러 번의 곤욕을 치르면서도 자산을 지키며 자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자.
큰 부 쌓으면서 국가 이득 챙긴 김근행
김근행은 인조 5년인 1627년, 왜학 역관에 합격하여 조정에서 대마도주에게 파견하는 공식 외교사절인 문위행(問慰行)의 통역관이 되었다. 이후 대마도와 왜로 가는 외교사절의 통역을 전담하다시피 하였고, 1663년에는 직접 문위행에 임명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탁월한 행정 능력과 장사 수완을 보여주면서 조선과 왜의 무역 거래를 독점하게 된다. 왜와 거래에 참여하고 싶은 사람들은 김근행을 통해서만 가능했고 왜와 조선 상인들은 김근행에게 통행세를 줘야 했다. 김근행은 자신의 부를 쌓으면서도 국가의 이득을 위해서 철저히 움직였다. 대마도주가 조선에 올 때마다 상국인 조선이 일본에 보내야 하는 공물은 부담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김근행은 대마도주의 잦은 방문으로 조선 재정에 피해를 주는 것을 막았고 화학에 필요한 유황을 밀수입하여 청나라 눈을 속이고 조선 정부가 매입하는 유황 가격보다 더욱 저렴하게 사 왔다. 김근행 덕분에 왜와 외교 무역은 조선 정부에 유리하게 돌아갔다.
곤욕 치르며 겸손하고 검소해진 김근행
옛말에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이 있다고 했다. 항상 잘될 수만은 없으므로 경계하라는 뜻이기도 한데 김근행도 곤욕스러운 일을 겪게 된다. 김근행은 비변사(備邊司)의 밀명을 받고 유황을 밀무역하고 있었다.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조선으로 들어오던 차에 포교들이 김근행의 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때 짐에서 나온 유황은 화약의 원료였으며 국가에서만 수입과 수출의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큰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임금의 귀에 이 소식이 들어갔으나 비변사의 밀명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며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김근행이 밀무역으로 돈을 많이 번다고 생각한 관노가 노비 신분을 면천 받고자 관청에 고발하여 벌어진 일이었다. 또 김근행은 중인 신분에도 불구하고 당상관(堂上官)에 종2품이라는 벼슬까지 얻어 양반들의 시샘을 받았다. 자신을 질시하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당상관 신분에 맞지 않는 질 낮은 관자(貫子)와 갓을 착용하였고, 관복이나 의복도 값싼 재질로 만들어 입었다. 사용하는 용품들도 모두 평범한 것을 쓰면서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다.
큰 부를 쌓은 사람들은 오히려 부를 과시하기보다 감추려고 한다.
김근행은 조선시대 왜와 무역을 독점하면서 나랏일도 도우며 큰 부를 쌓았다.
자신의 부를 질시하는 사람들로 인해 치른 곤욕은
겸손함과 검소함을 평생 유지하게 했고 큰 화를 피할 수 있었다.
최근 한국에서도 대기업 오너들의 검소한 옷차림이 이슈가 되는 것은
사회적 질시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김근행의 직업 역관에 관한 글을 청랑이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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