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가살이는 오랜 풍습이었다
'겉보리 서 말만 있으면 처가살이하랴' 이 속담은 오죽했으면 처가살이를 하나, 즉 처가살이는 할 것이 못 됨을 일컫는다. 그런데 처가살이 풍습은 고대 삼국시대 고구려서부터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서옥제(壻屋制)는 고구려의 혼인 제도로 신부의 집에 서옥(사위의 집)을 짓고 이곳에 신랑을 머무르게 했다. 그러다 신부가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장성하면 신랑과 함께 출가하도록 했다. 이런 풍습은 조선 전기까지 널리 행해졌다고 한다. 그러나 사림 세력이 정계에 진출하면서 유교 정치가 심화하고 남성 중심 체제로 가속화되었다. 이 때문에 남성의 처가살이하는 풍습은 점점 사라지게 되었다. 그 후 처가살이하는 남성들은 능력이 없거나 집안이 변변치 않다고 여기게 되었다. 처가살이가 정말 부끄러운 건가.
처가살이 10년 한 이순신 장군
일본 전국시대를 통합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0만의 군사를 조선으로 보냈다. 그러나 그의 대륙 정복 야심은 이순신(李舜臣)이라는 조선의 명장에게 철저히 차단당하고 말았다. 구국의 영웅 이순신이 청년 시절 오랫동안 처가살이를 한 사실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기록을 살펴보면 이순신은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 부득이 장기간 처가살이를 해야 했다. 그런데 이순신은 처가살이하는 동안 눈칫밥은커녕 오히려 후한 지원을 받았다. 이순신은 21살에 무관 출신으로 보성군수를 지냈던 방진(方辰)의 딸 방수진과 혼인하였다. 도적 떼가 멋모르고 방진 집에 들어왔다가 활을 잘 쏜다는 사실을 알고 혼비백산, 도망갔다는 일화도 있다. 그런 장인의 물심양면 지원 속에 이순신은 처음으로 무예를 배우며 무과시험을 준비했다. 이순신은 28세에 무과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4년이 지나서 무과에 합격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시험 성적은 무과시험(갑/을/병과) 중 병과에서 4등이었고 전체에서는 중간 정도였다. 이순신에게 아낌없는 지원을 한 처가가 그에겐 따뜻한 보금자리였다. 관직에 나간 이순신은 '처가'를 '본가'라 칭할 정도로 존중했다. 또 그는 장인 장모의 제사도 무남독녀였던 아내를 대신하여 지내주었다.
처부모 잔소리를 성장 기회로
2019년 말 중국 우한에서 처음 발생한 코로나는 세계 경제에 엄청난 타격을 가했다. 경기 부양책으로 금리 인하 기조를 유지하는 과정에서 부동산 가격이 천정부지로 뛰었다. 최근에는 미국을 비롯한 각국이 물가를 잡기 위해 금리를 큰 폭으로 올리자 영끌 대출로 내 집 마련에 나섰던 젊은이들이 고금리에 울상을 짓고 있다. 요즘 처가살이하는 신혼 남성들이 늘어나는 추세라고 한다. 남성은 신혼집 마련에 대한 부담에서 벗어나는 측면도 있지만 여성으로서는 육아에 친정 부모의 도움을 받는 것이 편하기 때문이다. 처가살이하는 사위는 장인 장모의 잔소리 때문에 장서갈등에 시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고 한다. 처부모의 잔소리가 자식 잘되라고 던지는 친부모 잔소리와 무슨 차이가 있는가. 처가 어른들의 지적을 잔소리가 아닌 조언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성장 기회로 삼으면 된다. 10년 동안 처가살이를 한 이순신은 구국의 꿈을 키웠다. 처가살이할 거면 ‘겉보리 서 말 있어도 여건에 따라 얼마든지 처가살이할 수 있지’라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자.
처가살이는 신세타령의 대상이 아니라 고대 때부터 행해져 온 우리의 오랜 풍습이었다.
이순신은 처가살이를 통해 구국의 꿈을 키웠다.
처가살이가 불가피하다면 부끄러워 말고 당당하고 떳떳하게 성장의 발판으로 삼자.
조부모의 자녀 교육법을 청랑이 추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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