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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랑 투자 식견

한국의 금융 신용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by JadeWolveS 2023. 10.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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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국가 채무가 1,120조에 육박해

국가 채무가 처음으로 1,100조가 넘어서면서 재정건전성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1,120조는 삼성전자 같은 기업을 3개나 만들 수 있는 돈이기도 하다. 국민이 천문학적인 숫자를 체감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만 늘어날 빚을 고려하면 미래 세대에게 큰 부담을 떠넘겨 주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쉽사리 가늠되지 않는 빚에도 한국이 움직일 수 있는 것은 금융 신용 시스템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금융 신용이 어떻게 이용되었는지 알아보고 현대금융과 비교해 보자.

 

고려사에 기록된 제위

국가 경비를 충당하기 위해 금융사 만든 고려

현대 문명이 발전을 거듭하도록 만들어 준 자본은 신용을 기초로 하였다. 고대 이집트 문헌에도 신용에 대한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신용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고려도 신용을 이용한 이자 장사를 하였다. 고려시대에는 나라가 빈민과 병제를 구제하기 위해 신용으로 쌀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사업을 운영하였다. 팔관보(八關寶)에서 고려의 중요한 행사 중 하나인 팔관회(八關會)의 경비를 충당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보 받은 쌀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 운영하였다. 제위보(濟危寶)와 팔관보는 고려 조정이 관리하는 현대판 금융사였다. 두 기관은 쌀과 돈을 비축하여 대출해 주고 이자값으로 사업을 유지하려 하였으나 고려 말기 국가가 백성들을 상대로 고금리 고리업을 시작하면서 본 사업의 기능이 약화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수갑계첩(壽甲稧帖)」중 계회도, 지본담채, 29.3cm, 가로 37.4cm, 국립중앙박물관 ㅣ 무인년(戊寅年)인 1758년에 태어난 중인(中人) 22명이 모여 갑계를 조직했는데 명칭이 수갑계(壽甲稧)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이 57세가 되던 1814년에 계원인 정윤상(丁允祥)의 중부 약석방(藥石坊) 집에서 모임을 갖고 「수갑계첩(壽甲稧帖)」을 만들었다.

세금 부담을 줄이고자 만들어진 '계'

계(契)는 한국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경제적 협력 단체를 말한다. 고려 말 백성은 귀족의 세금 착취가 심해지자 값비싼 이자를 내고 돈을 빌렸다가 노예가 되는 일이 허다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면서 백성들은 세금 부담을 덜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각자 쌀과 돈을 내 하나의 계를 만들었다. 계를 통해 모인 돈은 계원들에게 저렴한 이자를 받고 빌려주어 고리대금 업자에게 고금리 이자를 갚지 못해 불상사가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계는 조선 시대에 전국적으로 유행하며 현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계는 계원을 통해 자금을 내서 계원이나 계원 외의 사람들에게도 돈을 갚을 능력이 있는지 보고 즉, 신용을 평가하여 이자 값을 매기기 시작하였다. 훗날 공공의 목적을 위해 다양한 형태의 계가 우후죽순 생기면서 고금리 이자를 준다며 계원을 모았다. 그리하여 계의 본래 취지가 무색하게 계에서 빌리는 돈도 높은 이자값을 물어야 했고 이는 다시금 백성들에게 고통을 안겨주었다.

 

 


고려, 조선에서도

현대 금융 신용 시스템과 비슷한 형태가 운영되고 있었다.
과거나 현재나 돈 없고 힘없는 백성들은
신용도가 낮아 고금리에 몰리는 상황은 비슷한 듯하다.

 

 

과거와 현재를 비교해보는 글을 청랑이 추천합니다.
 

현대판 신분제는 어떤 모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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