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시영 이혼 절차 진행 중
배우 이시영이 결혼 8년 만에 이혼 절차를 진행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녀는 사업가 조 모 씨와 2017년 결혼해 아들을 두었으며, SNS를 통해 행복한 결혼 생활을 공유해 왔습니다. 그러나 올 초 서울가정법원에 이혼 서류를 제출했으며, 현재 세부 사항을 조율 중입니다. 소속사는 상호 원만한 합의에 따른 이혼이라고 밝혔지만, 구체적인 사유는 공개하지 않았다. 연예계에서는 최근 잉꼬부부로 알려졌던 여러 커플들의 갑작스러운 파경 소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대중 앞에서만 사이좋은 부부처럼 보였으며 실상은 달랐습니다. 과거에도 쇼윈도(겉으로만 멋진) 같은 부부를 역사 속에서 찾아봅시다.

결혼의 시작: 정치적 동맹과 사랑
캐서린 아라곤 (Catherine of Aragon) 은 스페인의 강력한 군주 페르난도 2세(Ferdinand II)와 이사벨 1세(Isabella I)의 딸로, 어린 시절부터 잉글랜드 왕가와 혼인 동맹을 맺도록 계획되었습니다. 1501년, 캐서린은 헨리 8세의 형이자 당시 잉글랜드 왕위 계승자인 아서 튜더(Arthur Tudor)와 결혼했으나, 결혼 6개월 만에 아서가 사망하면서 미망인이 되었습니다.
아서가 사망한 후, 헨리 8세의 아버지인 헨리 7세(Henry VII)는 캐서린을 그대로 잉글랜드에 머물게 했으며, 나중에 헨리 8세와 결혼하도록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법에 따르면, 형수와의 결혼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캐서린과 헨리의 결혼을 위해서는 교황 율리오 2세(Pope Julius II)의 특별 면제가 필요했습니다. 결국 교황은 결혼을 승인하였고, 1509년 헨리 8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캐서린과 결혼하여 잉글랜드 왕비가 되었습니다.


행복한 결혼 생활 아들 생산 못하자 부부사이 멀어지다
초반에는 헨리 8세와 캐서린의 관계는 정말로 사랑이 넘치는 결혼 생활이었습니다. 캐서린은 매우 지적이고 신중한 성격이었으며, 정치적으로도 뛰어나 왕비로서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습니다. 1513년 헨리 8세가 프랑스를 침공했을 때, 그는 캐서린에게 영국을 대신 통치할 권한을 부여했으며,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침공을 막아내는 등 뛰어난 리더십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캐서린은 여러 차례 유산을 겪었고, 1511년, 그녀는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들을 출산했으나, 아이가 두 달 만에 사망하며 왕실에는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1516년에서야 딸 메리 1세(Mary I, 훗날 잉글랜드 여왕)를 출산했지만, 헨리 8세는 남자 후계자가 필요하다는 강박에 시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왕권 강화를 위해 아들을 간절히 원했던 헨리 8세는 캐서린이 더 이상 건강한 후계자를 낳을 수 없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헨리 8세 후계자 생산을 위해 이혼을 선택하다
1525년 무렵, 헨리 8세는 앤 볼린(Anne Boleyn)이라는 젊고 매력적인 귀족 여성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앤 불린은 캐서린과 달리 젊고 건강하며 후계자를 낳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받았고, 헨리 8세는 그녀를 왕비로 삼기 위해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려는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결혼이 형수와의 결혼이었기 때문에 원래 무효라고 주장하며, 가톨릭 교황 클레멘스 7세(Pope Clement VII)에게 결혼을 무효화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캐서린은 신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자신의 결혼이 합법적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또한, 캐서린의 조카는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카를 5세였고, 그는 로마를 통제하는 강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교황은 헨리 8세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결국 헨리 8세는 자신이 직접 영국 국교회를 창설하고, 교황의 권위를 거부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헨리 8세와 캐서린 오프 아라곤 이혼하다
1533년, 헨리 8세는 영국 국교회를 창설하고,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Thomas Cranmer)에게 캐서린과의 결혼을 무효화하도록 지시했습니다. 같은 해, 앤 볼린과 결혼하며 그녀를 새로운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캐서린은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며, 이후 잉글랜드 북부의 외딴 성으로 유배되었습니다. 왕비에서 폐위된 후, 캐서린은 "공주 미망인(Widow Princess of Wales)"이라는 낮은 지위로 강등되었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딸 메리 1세와의 접촉이 제한되었으며, 외롭게 유배 생활을 하다가 1536년 1월 7일 병으로 사망했습니다. 그녀는 죽기 전까지도 헨리 8세를 "나의 주군, 나의 왕, 나의 남편"이라 부르며 충성을 다했지만, 헨리 8세는 그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헨리 8세는 정략적으로 아내를 이용했고 후계자 생산을 하지 못하자, 매정하게 아내를 버렸습니다. 초기 대중들 앞에서는 완벽한 부부처럼 보였지만 훗날 역사에서는 불행한 부부 중에 한 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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