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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선종으로 추모행렬, 역사 속 위대한 교황 누구였을까?

by JWS 2025. 4. 26.

카톨릭 수장 교황 추모행렬 이어져

프란치스코 교황의 시신이 안치된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전에는 조문 시작 이틀 만에 9만 명이 넘는 인파가 다녀갔습니다. 예상보다 많은 추모객이 몰리자 교황청은 조문 시간을 밤새 연장했고, 청소 후 바로 재개해 연일 긴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톨릭교회의 제266대 교황으로, 2013년 아르헨티나 출신 교황으로는 처음, 또 비유럽권 출신으로는 약 1,200년 만에 선출되었습니다. 본명은 호르헤 마리오 베르골료이며, 예수회 출신으로 검소하고 겸손한 삶의 태도와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민으로 널리 존경받았습니다. 교황 재임 기간 동안 빈곤, 환경, 이민, 성직자 성범죄 등 민감한 이슈에 적극 목소리를 내며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회’를 강조하고 전통적 형식보다 실천적 사랑을 중시했습니다. 평화와 대화, 관용을 강조하는 교황으로서 국제사회에서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습니다. ‘프란치스코’라는 이름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서 따온 것으로, 겸손과 평화의 상징입니다. 조문객들은 오랜 대기에도 불구하고 교황에 대한 존경과 애도의 뜻으로 밤새 자리를 지켰으며, 세계 각국에서 온 이들의 경험은 하나의 숭고한 의식이 되었습니다. 세상을 위해 노력했던 역대 교황 중에 훌륭한 인물은 누가 있었을까요?

[서울=뉴시스] 제266대 교황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종한 가운데 서울 중구 명동대성당 영성센터에서 신도들이 외벽에 걸린 프란치스코 교황 사진


혼란의 로마를 정비하다

6세기 말, 서로마 제국이 붕괴된 뒤 유럽은 정치적 공백과 침략, 기근, 질병에 시달리며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 중심지인 로마 역시 더 이상 제국의 수도가 아닌, 사실상 무정부 상태에 가까운 폐허로 변해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등장한 인물이 교황 그레고리우스 1세였습니다. 그는 로마 64대 교황으로 단순히 종교 지도자에 머무르지 않고 행정가, 복지 관리자, 심지어는 군사 조직자 역할까지 수행하며 무너진 도시 로마를 안정시켰습니다.

그레고리우스는 당시 기근에 시달리던 로마 시민들에게 식량을 배급하고, 교황청의 재산을 활용해 빈민과 환자를 구제했습니다. 게르만족의 침입 위협 속에서는 직접 방어 계획을 세우고, 지방 영주들과 협상을 벌여 평화를 도모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활동은 교황의 역할이 단순한 성직자에서 ‘도시의 총괄 책임자’로 확장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고, 이후 서유럽에서 교황권의 정치적 위상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었습니다.


카톨릭 교황으로서 책임을 다하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정치적인 리더십을 발휘하는 동시에 교황 본연의 종교적 사명을 결코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특히 기독교 세계의 확장을 위해 적극적인 선교 정책을 펼쳤으며, 대표적으로 영국의 앵글로색슨족을 개종시키기 위해 수도사 아우구스티누스를 캔터베리로 파견하였습니다. 이는 오늘날 영국 국교회의 뿌리가 되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고, 로마 중심의 라틴 기독교가 북유럽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 교회의 음악 예식을 정비하며, 우리가 오늘날 '그레고리오 성가(Gregorian Chant)'라 부르는 전통을 정립하였습니다. 이 성가는 중세 전체를 관통하며 기독교 예배의 중심 형식으로 자리 잡았고, 서양 음악사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습니다. 더불어 그는 다수의 설교와 신학 문서를 남겨 중세 교리의 기초를 닦았고, 아우구스티누스 이후 가장 위대한 라틴 신학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레고리우스 1세는 ‘대(大) 그레고리’라는 별칭에 걸맞게, 무너진 세계를 다시 세우고자 했던 교회의 이상을 실천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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